소감
짧은 평
이름에 대한 뜻이 먼저 궁금해지는 책이다.
사랑에 이유를 성찰하는 소설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답을 같이 추적하는 추리 소설처럼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소설에 매우 다양한 고찰이 담겨있다.
저명한 시인, 철학자 등의 문구를 빌려 다양한 주장과 생각의 변화를 담는다.
인문학 소양이 깊은 사람일수록 책을 읽으며 재미를 찾을 것 같다.
우리 모임에 그동안 사랑에 대한 소설이 확실히 없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신선하게 다가오긴 한다.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지 않은 영역이니까.
인상 깊은 구절
인상 깊은 구절은 엄청 많았다.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마르크스주의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의미가 퇴색된다.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상대에 의해 완성되는 나.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 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생각 덩어리
사랑하는 이유
사랑의 주체
1. 이상화에서 생각이 들었다.
5.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하고 불안한 면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만이 이유는 분명 아닐 것이다.
성적 욕망이 우리의 본능에 내재해있으니, 성적 정체성에 맞춰 상대를 선택하게 된다.
현재의 나는 저런 의견이 솔직히 갖다붙이는 해석으로 보인다.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본질적인 영역의 이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의 객체
11. 회의주의와 신앙에서부터 점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상대가 어떤 부분을 사랑해주길 바라는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상대가 나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것.
근데, 육체에 끌려서 사랑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러나 탐정, 고고학자처럼 우리는 이 근본 없는 희망에 신변잡기에 머물 뿐이다.
13. “나”의 확인에서도 말하듯,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
사랑에 빠지는 과정
2. 이면의 의미를 보면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상대를 알고 싶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지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성과 감정
책의 전반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이다.
이성을 배격하는 감정
사랑할 때는 어느 정도 이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한다.
콩깍지가 씌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특히 잠자리를 하는 경우에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판단을 필히 유보해야 한다.
오직 순간의 감정과 욕망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긴 하다.
이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방향의 주장이 더 나아가게 되면 낭만적 실증주의자가 될 것이다.
낮은 자존감에서 이뤄지는 이성적 판단은 5. 마르크스주의자를 낳는다.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그런 완벽한) 상대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체로 콩깍지의 과정에는 상대를 우상화하는 과정이 들어간다.
8. 아름다움에서 콩깍지에 대한 조금 더 깊은 고찰이 이뤄진다.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오히려 상대를 재배치하며 직접 아름다움을 재배치할 수 있다.
근데 여기에서 사실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 이성이 개입한다고 본다.
우리는 해석하며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을 곁들여서 상대를 긍정적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나는 아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성과 감정의 연속성
흔히 보는 서양적인 사고 방식이 바로 이성과 감정을 이원화시키는 것이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사실 최근 뇌과학에서는 담당하는 영역의 차이 정도만 있지 그렇게까지 구분하지는 않는 것으로 안다.
특히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먼저 감정의 영역이 동한다는 연구가 있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이 지변에 깔려서 낭만적 실증주의자가 비판 받는 것 같다.
왜 사랑의 감정에서 꼭 이성이 배격돼야 하는가.
사실 엄밀히 보면, 이성이 개입되는 성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도 급 의문이 든다.
관련 학자들의 논문을 찾아보고 싶기는데, 그 정도로까지 깊게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 보류..
사랑과 도덕
도덕적으로 사랑을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사실 책에서는 결론이 난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은 항상 드는 것 같기는 하다.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에서도 간음죄를 형법으로 다뤘던 시기도 있었고, 더 과거로 간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은 이를 죄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형태
다른 방식도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나
23. 사랑의 교훈, 18. 선악을 넘어서 부분에서 생각이 많이 들었다.
7. 사랑이냐 자유주의냐에서 나오는 예수의 사랑은 연인 관계에서 성립할 수 없는가?
스스로는 그리 깨지고 예수적 마인드가 되어놓고 말이다..
위에 [[#이성과 감정의 연속성]]에서도 조금 이야기한 부분에서 연장을 시켜보자.
사랑에 상대를 옭아매는 과정이 필수적인가?
충분히 사랑에 비이성이 개입될 여지는 있지만, 왜 그런 것만이 사랑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인가?
7. 사랑이냐 자유주의냐에서도 이러한 시선이 보인다.
밀의 자유론이 사랑에서 성립할 수 없는가.
나는 이산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부부의 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불타오르는 욕망만이 사랑은 아니다.
새롭지 않고, 익숙함에서 느껴지는 정이 오히려 사랑의 정수일 수도 있다.
12. 친밀성에서 보듯이 나와의 관계가 형성되고 추억이 쌓이며 반대로 새로움은 줄어든다.
사랑이 순환 관계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냥 나는 시간의 변화로 커지는 부분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부부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14. 마음의 동요에서 말하는 가능성과도 관련있다.
어쩌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 생각보다 한 층위를 더 나누는 것 같기는 하다.
나는 크게는 연인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 정도로 일단 층을 나누는 편인 것 같다.
그러나 책에서는 새로움이 사라지고, 서로가 익숙함에 놓인 층위가 있다.
이 층위가 부부의 사랑과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마치 9. 사랑을 말하기에서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현재 나에 대한 성찰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에 대한 고민도 한번쯤은 다시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독신으로 살다 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과거와 현대의 사랑에 대한 인식 변화
이건 시대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동서양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나.
어느 쪽으로든 사회문화는 연애관에 대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사랑이란 것은 어떤 색을 띄고 있을까?
이건 발제자가 고민해주지 않을까 싶긴하다.
과거에는 가스라이팅도 사랑 아니었습니까?